재솔/12013. 12. 4. 14:00

이 블로그에는 뜻 없이 부유하는 비문이나 신변잡기는 올리지 않고 서론, 본론, 결론 갖춘 글, 적어도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갖춘 하나의 글만을 올리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결국 시작도 못하게 되었다. 요새는 시를 거의 읽지 않았는데, 페이스북에서 황해문화 편집장 전성원 씨가 올린 시 몇 편이 마음에 들어서 긁어온다.


*

삶 이후의 삶

- 곽효환

지구 역사상 스스로의 수명을 끊임없이 놀라울 정도로 늘려온 유일한 존재인 인간이 직면한 가장 큰 고민은 삶 이후의 삶이다.

페루 중남부 안데스 산맥 고원에 자리 잡은 고대 잉카 제국의 후예들은 인생은 사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살만치 살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좋은 날을 택해 가족과 친지, 은인, 더불어 살고 있는 마을 사람 그리고 척 지고 등 돌렸던 사람들까지 모두를 불러 성대한 잔치를 연다.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나면 세상일에 손을 놓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오랜 관습이다. 사람들도 그날 이후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보아도 보았다 하지 않는다. 남은 삶은 그렇게 살아 있으나 죽어 있고 혹은 그렇게 존재하거나 사라진다

<곽효환, 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사, 2011>


*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 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 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흐르는 강물처럼

- 유하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힘만으로
생명의 산소를 만들고 서로의 잎새를 키운다네
친구여, 그대가 혼자 걸었던 날의 흐르는 강물을
부디 잊지 말길 바라네
서로를 주장하지도 다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처럼
그대도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스며드는 곳에서 삶의 심연을 얻을 거라 믿고 있네
그렇게 한 인생의 바다에 당도하리라
나는 믿고 있네


*

혼자 부르는 이름 하나

- 홍신선

늦가을 저문 노래 지고 가다가
바람들이 혈혈단신 갈대에게 벗어 내주는
이 변방 외진 길
혼자서 걷노라면
아, 외워보고 싶은 까마득한 이름 하나.

나이 늘어 그날의 혀와 입은 왼통 지워지고
나는
쓸쓸한 목숨만으로 외일 뿐이니

사랑했던 사람아
지금 너는 어느 단란한 부엌에서
밥그릇들을 씻어 얹는가
지아비와 잠든 어린것들 곁에서
추억의 싸늘한 독들을 깊이 묻는가
세상과 시간은 갈수록 서늘한 등줄기로
무연총(無緣塚)처럼 사나웁게 주저앉고
이 길가 흔들리는 잡풀들에게는
우수수우수수
누군가의 내버린 귀(耳)들이
저리도 부질없이 많은 것인가

저리도 부질없이 많은 것인가
들어줄 누구도 없이
혼자 외워보는
까마득한 이름 하나




뜨거운 안녕

김은경

목욕탕에서 때를 밀다 속옷을 갈아입다
상처에 눈 머무는 순간이 있지
훔쳐봄을 의식하지 않은 맨몸일 때 가령 상처는
가시라기보다는 빨강 도드라진 꽃눈일 텐데
눈물로 돋을새김 한 천년의 미소래도 무방할 텐데

어디에 박혔건 내력이야 한결같을 테지만
죽지 않았으니 상처도 남은 것 그리 믿으면
더 억울할 일도 없을까

오래전 당신은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또 이름 모를
그대에게 교환될 수 없는 상처를 보냈네
403호로 배달된 상처 한 상자를 대신 받은 기억 있고
쓰레기 더미 속 상처를 기쁘게 주워 입기도 했네

지나갔으니 이유는 묻지 않겠어 당신
왜 하필 내게 상처를 주었는지
하지만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
내게는 꽉 끼었지 그래 나는 아팠었지
천진한 햇살마저 나는 조금 아팠겠지

이제 그때만큼 아프지 않아
난 다 자랐으니까 폴리백처럼 가벼워졌으니까
(껴안고 사랑할 순 없어도
버릴 수도 없는 일이잖아!)

이제 난 눈물 없는 노래도 부를 줄 알아

生이 너무 즐거운 비명 같은 날이면 바람 부는
구름 속을 홀로 산책하겠어
새로 산 티베트풍 모자를 덮어쓰고 경쾌한
도트 무늬 스커트를 허리에 걸치고
한번쯤은 기꺼이, 가벼운 외투 같은 상처를
장롱에서 꺼내 입어볼게 옛날 옛적
당신에게 받은 상처를
선물인 듯 간직할게

세세만년 전 당신이여
그러면 정말 안녕


*

꽃단추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 시(詩)는 어째서 행과 연을 구분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면 리듬(律) 때문이다. 그럼, 시에서 리듬이 왜 중요한가? 그건 시가 본래 노래였기 때문이다. 행갈이 하나가 시의 폭발력과 긴장을 좌우한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현대시는 대체로 내재율(內在律)이기 때문에 또 시를 읽을 때 요즘 사람들은 소리 내어 읽기 보다는 속으로 읽는 묵독(黙讀)을 주로 하기에 시의 리듬을 맛보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시는 소리 내어 낭송(朗誦)해봐야 그 본래의 맛을 알 수 있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이 문학적으로도 위대한 작품으로 살아남은 까닭은 단지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풍자의 맛이나 시대적 조건이 맞아떨어진 뿐만 아니라 이 시가 우리 전래의 판소리 리듬을 문학적으로 계승한 시였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소리내어 읽어보면 낭창낭창하게 감기면서 깐족거리는 맛이 판소리의 리듬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계승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행갈이는 그렇다 쳐도 연갈이는 문제가 좀더 복잡하다. 이형기는 “의미(내용)와 소리(형식)의 유기적 결합이 운율의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행갈이 보다 더 큰 구분이 연이다. 그러나 연 구분은 아무래도 단락의 의미가 더 크기 마련이다. 낭송보다 묵독이 일반화된 이후 시인들은 음악적인 측면보다는 회화성을 확보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시란 이미지(image)라고 배우는 바로 그것 말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나 소재와 같은 내용을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할 것인지 고민하다보면 리듬에 대해 배려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시의 리듬은 재즈 뮤지션의 그것처럼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손택수 시인의 「꽃단추」를 읽다가 갑자기 「오적」에서 재즈 뮤지션의 리듬 타령까지 흘러간 이유는 내 보기에 이 시는 한 편이 아니라 두 편의 시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적 정황만으로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시적 정황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 「꽃단추」는 두 개의 시적 정황이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해와 달, 금단추와 은단추의 시적 정황과 민들레 꽃단추라는 시적 정황이 민들레의 “흔들리는 실뿌리”처럼 야무지게 두 개의 각기 다른 시적 정황을 연결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지 않는 이도 있겠지만 내 눈엔 그리 보인다. 아쉽지만 말이다.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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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문

2.
우리 시대는 '파국'을 기피하는 시대다. 우리는 생산력이 모든 결핍을 채우고,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본주의가 모든 이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어떤 도저한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간지를 발휘하며 선드르이 시험과 괴물들의 손아귀를 피해 페넬로페의 품으로 돌아간 오디세우스처럼, 이 시대는 기존의 생산력과 과학기술과 시스템을 물신화함으로써 다린 모든 균열을 덮고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가장 실제적인 파국의 가능성에 직면한 시대다. 도처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몰려오고, 봉기가 발생하고, 경제위기가 반복되고 있다. 부자들이 하늘에 닿은 바벨탑 위로 올라가는 반면 빈민들은 점점 지하로 내려가고, 그 중간에 있었던 이들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어떤 재난도 극복하는 국가, 그 어떤 우기도 이겨내는 시장의 힘을 맹신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높아가는 허무와 불안과 분노 속에서 그저 하루 하루 견뎌내는 전쟁 같은 삶ㅇ르 산다. 체제가 유토피아를 설파하는 동안 인민은 디스토피아를 예감하는 균열이 있고, 문화는 파국에 관한 상상력으로 그 균열을 채운다.
(...)
파국의 상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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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영화 팬이 되는 열 가지 수칙> 

『별건곤』제 29호, 1930.6 

1.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사실에서 란 간단한 비평 비슷한 것이 실리는데 이를 먼저 통독해야 함 
2.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변소에 다녀올 것 통로를 건너거나 할 때 침착할 것
3. 사진이 시작되기 전에 프로그램이나 위크리에 쓰인 푸로트를 읽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 그런 것을 읽지 않고 영화 스토리를 모르는 것은 영화팬으로서 적지 않은 문제임 끝난 뒤에 라스트 씬을 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영화팬으로서 용서치 못할 일 
4. 휴식시간에는 구락을 봐도 좋고 안봐도 좋지만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은 주의할 일 고급영화팬은 그리 헐하게 감격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정말 우스워 못 보겠네 이건 지독헌데 등의 능청스러움을 가져야 함 
5. 영사 중에 갑자기 필름이 끊어지면 크리스트와 같은 얼굴을 하고 묵묵히 앉아있어야 함. 정전 되었을 때에도 자리에 앉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척 해야함 그러다 눈을 감고 그대로 잠들어 버리면 곤란함 
6. 해설자가 쓸 데 없는 것을 늘어놓거나 자막 같은 것을 오역했을 때에는 아주 무서운 얼굴로 나서서 해설자를 노려보아야 함 정의의 열혈이 끓어오르는 지사와 같은 느낌을 갖게되어 마음이 쾌해짐 
7. 영화를 본 후 비평할 때 스토리 시나리오 배우 등에 대한 판에 박은 듯한 비평을 한다면 고급 영화팬이 될 수 없음 경구를 토해 한마디로 그 영화를 차던져야 함 
8. 이름 있는 영화를 다 보지 않더라도 고급 영화팬이 될 수 있음 그 대신 신문 잡지에 실리는 영화비평을 정독해두었다가 사람들이 왜 안보냐고 물으면 결국 하잘 것 없는 스토리에 좌우된 영화였었지 뭐야 하고 한마디로 격퇴해버리면 그만 
9. 복색은 너무 화려해서는 곤란 자칫 부랑자나 모뽀로 잘못 보이기 쉽기 때문 고급 영화팬은 촬영소인종 비평가 부류 등과 혼동되는 것을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피해야 함
10. 유행 영화인 토 키에 대한 것인데 고급 영화팬들은 그것이 사운드 픽취이면 상관이 없지만 불행히도 토킹 픽취일 때는 근신을 해야한다 동반자의 질문에 응하지 못하야 천추에 회한으로 남길 염려가 없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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