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12013. 10. 26. 23:04

2013-2 영화비평세미나1
 
 

잡지 『영화세계』를 통해 본 1950년대 영화 저널리즘의 정체성

전지니, 『근대서지』, 근대서지학회, 2013, vol.7

  

1. 1950년대의 한국영화와 영화잡지들

전후 1955년 영화인들이 현장에 복귀하면서 한국영화는 중흥기를 맞게 된다. 특히 영화산업 부흥책의 일환인 1954년의 「국산영화면제조치」는 영화 산업에 큰 활력을 주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이규환의 <춘향전>(1955)은 프로덕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이강천의 <피아골>(1955)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한형모의 <자유부인>(1956)은 멜로드라마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영화가 성장하면서 영화 저널리즘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50년대 중반부터 『영화계』(1954.2), 『영화세계』(1954.12), 『국제영화』(1955), 『신영화』(1957.4), 『현대영화』(1958.1), 『스크린』, 『씨나리오 문예』(1959.1) 등의 잡지가 발간되었다. 이 중 『영화세계』와 『국제영화』 두 잡지만이 60년대 초반까지 비교적 정기적으로 간행된다.

50년대 영화잡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영화의 양적 성장 이면의 질적 하락에 대해 고민하며 영화 저널리즘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한편 동시에 화보와 가십 역시 비중 있게 실으면서 오락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자 했다. 이 가운데 『영화세계』는, 한국영화의 부흥과 함께 출발해 50년대 후반 질 낮은 영화 양산으로 인한 위기의 시기를 통과하고, 4.19를 거쳐 박정희 정권의 영화법[각주:1] 시행 초기까지의 부침을 함께 했다. 동시에 각각의 정황 속에서 영화 저널리즘의 방향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해왔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본 글은 대략 10년의 기간 동안 발행되었던 『영화세계』를 통해 영화전문지와 대중을 겨냥한 종합잡지 사이에서 50년대 영화 저널리즘의 정체성 모색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2. 『영화세계』의 필진과 주요 기사

『영화세계』의 주요 필진은 당시 영화계의 대표적 인사들이었으며, 홍성기, 유현목과 같은 유명 필진들도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했다. 아래는 각 호별 발행인, 필진, 주요 기사와 각 호의 특징이다.

1) 54년 창간호: 발행인 정운선, 영화인들 외에 문인들이 필진으로 대거 합류. 문인들은 국산영화 진흥, 영화의 국책성과 예술성 및 영화의 수위 문제에 대한 글을 실었다. 「영화는 문학을 압도할 것인가」(백철)는 필름을 재료로 한 영화의 사실적 표현수단이 문학에 비해 리얼리티를 잘 나타낼 수 있지만, 영화는 본격적인 심오한 심리묘사를 하는데 있어 문학에 미치지 못한다는 요지의 글. 「외국영화수입의 무정책성과 국산영화재건을 위하여」(김광섭), 「한국영화의 국책성과 예술성」(이헌구) 두 글에서는 한국영화의 내외적 조건에 대한 고민을 다루었다. 「구미영화계 현황보고」는 오영진, 김성민의 대담 형식으로 발표된 글이다.

2) 55년 3월호: 창간호에 비해 소략하게 출판. 「허리욷 남녀배우 밤의 생태」와 같은 흥미위주의 기사 비중이 커졌다.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구상」은 이성철, 이헌구, 김광섭 등의 문인, 감독 안종화, 윤봉춤, 한형모와 최완규(고려영화주식회사 사장), 윤명혁(대한영화배급협회장), 윤고종(『조선일보』문화부장), 배우 전택이, 박경주가 함께한 좌담을 실은 글이다. 이 자리에서 영화인들은 외국영화 수입 제한의 필요성, 한국영화 수출문제, 우수한 영화평론 부재 등과 같은 한국영화계 전반의 문제점들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3) 55년 5월호: 국내 영화계 상황과 관련된 기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동좌담'이라는 표제로 「전국 영화인 컨디숀 지상 시합」이 기획되었으며, 복혜숙, 김일해, 윤봉춘, 홍성기, 유두연 등이 참여했다.

4) 55년 6・7월 합병호: 한국영화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기사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국내외 스타 결혼 5개 신조」와 같은 오락성 기사의 비중이 높아졌다. 지난 호에 이어 '이동좌담' 코너는 게시된다.

5) 55년 11월호: 대표 박인규. 「한국영화의 발달과 그 전망」은 조셉 L. 앤더슨의 특별기고로, 그는 한국영화의 문제는 재능의 빈곤이 아닌 영화 기업의 근본 부재에 있다고 설명한다. 영화기업이 개인적이고 영화에 대한 당국의 태도가 적대적이며, 정부의 원조가 미지근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입장세 철폐 조치(54)가 이후 영화 기업의 건전한 기초를 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예견한다.

6) 56년 신년호: ‘영화교실'과 시나리오 전체를 수록함으로써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발간 의도를 밝힌다. 「1955년도의 총결산과 신년의 전망」은 박인환, 유두연, 이봉래가 함께한 좌담회로, 각각 <피아골>의 논평들이 영화 저널리즘 활성화에 끼친 영향, 시대극이 범람하는 현상, 국산영화 면세조치와 맞물려 양산되는 저급한 영화들에 대해 논했다.

7) 56년 4월호: 잡지의 표지에 헐리우드 여배우들이 실리기 시작. 외화를 받아들이는 방법, 우리 영화 해외 진출 문제, 합작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논한 좌담회 「한국영화의 신구상」이 실렸다.

8) 56년 6월호: 황영빈은 「한국영화가 걷고 있는 길」에서 면세조치로 인해 저급한 영화가 생산되는 상황에서 생존 경쟁 원칙에 따른 자연도태가 영화계의 질서 유지에 올바른 방법이라는 요지를 전한다. 또한 각색물이 영화적 처리에 있어 기술 부족 문제를 드러냈으며, 흥행성으로만 작품이 평가 받는 영화계 풍토를 비판한다.

9) 57년 4월호: 전문지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겠다는 시도를 반영. 학술적 성격을 강화하겠다는 기획 하에 이봉래, 허백년 등 기존의 권위 있는 필진 외에 최백산 등이 합류. 이봉래는 「한국영화의 가능성」에서 국산 영화의 질적 빈곤의 제작조건이나 시설의 빈곤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주체적 정신의 상실에 있다고 주장한다.

10) 57년 8,9월 합병호: 유현목, 이일, 문일영 등이 참여한 ‘평론특집’이 실림. 「영화감독이 본 여배우 5인상」, 호기현은 「한국영화의 위기」에서 작금의 위기의 원인은 기획면의 무지라고 주장. (여기에서 기획은 관객층, 흥행 시즌, 시나리오의 선택, 감독 및 배우 선정, 제작비 예산 등을 담당하는 분야의 총칭.) 이영일은 「영화평론가 3인의 프로필」이라는 글에서 유두연, 이진섭, 황영빈 3인의 특징을 서술한다.

11) 58년 5월호: 강인순이 사장으로 취임하며 평론지로서의 성격이 강화됨. 잡지의 발행 목표는 '健實한 思想, 새로운 呼吸에 依한 映畵의 指標'(건실한 사상, 새로운 호흡에 의한 영화의 지표)로 공표됨. 헐리우드 영화 관련 기사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민족적 입장에서 한국영화 진흥을 위한 잡지의 방향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영화계에 자성을 요구하려는 의도를 반영해 「영화계에 주는 협박장」이 게시된다.

12) 58년 9월호: 공식적으로 본 잡지가 ‘영화평론지'임을 천명. 잡지의 규격 축소. 특집으로 ‘한국영화의 전환점'을 기획. 여기에서 신구철은 '사실'에 초점을 두고 민중의 빈곤한 생활과 압제에 대한 생존적 자기주장을 강조하는 영화, 곧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에서 한국영화의 방향을 찾을 것을 역설했다. 『영화세계』는 통권 24호인 본 호를 '개혁판'으로 간주하고 본격적인 평론지를 지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락지의 성격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는다.

13) 58년 10월호: 지난호의 연장선. 특집 '씨나리오의 새로운 방향'.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영화비평을 비평한다」에서 이영순은 선전이나 광고가 아닌 이치에 맞는 영화비평을 해달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한편 영화평론지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겠다는 시도들은 결국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규격도 이전으로 돌아갔으며, 다시 헐리우드 여배우의 사진이 잡지의 표지사진으로 사용된다. 남아있는 『영화세계』의 판본들만 가지고는 대중지로 선회한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58년 12월호가 여배우 조미령의 사생활 침해로 문제시 되었던 사실은 평론지로서의 시도가 무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으로 강인순과 기자 강대선은 유죄를 선고 받는다.)

 

14) 59년 7월호: 사징 강대진. 헐리우드, 국내 배우들의 가십으로 지면을 채움. '한국영화의 지표'로서의 방향성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시나리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시나리오는 매호 게재된다.

 

이상의 서술을 간단히 요약하면, 『영화세계』발행 초기에는 문인들이 대거 합류하여 영화의 예술성 문제 및 국산영화 진흥책을 논했고, 이후 영화 전문지로서의 성격이 약화된다. 대신 오락지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57년 이후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해 진단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고, 58년에는 영화 저널리즘의 사명감을 갖고 재출발하겠다는 취지에서 개혁판이 발행된다. 이에 영화 전문지로서 재탄생하려는 기획들이 시도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3. 영화학도와 대중, 평론지와 오락지 사이에서의 정체성 찾기

사장 겸 발행인 정운선은 『영화세계』발간사에서 "우리 국산영화 육성에 작은 도움이나마 되고 오늘날과 같이 무비판적인 해외영화수입으로 야기되는 가진 사회악의 조장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지침으로서 다소라도 역할을 자부하고 감히 이 『영화세계』를 독자 제위 앞에 내놓는 바"라고 발행 의도를 밝힌다.

 

56년 4월호 「편집후기」

본지는 한돐이 지나고도 석달이 된다. 그러면 통권이 이번호로서 십오권이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구권째다. 이것이 한국이 유일의 영화지가 걸어온 형로이다. 마치 우리 한국영화가 걸어온 것처럼 영화지가 제작되는 과정은 국산영화 제작과정과 대동소이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편집후기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애국주의적 의도에서 출발해 영화계 진흥에 기여하겠다는 사명감을 이어갔지만, 57년도까지 『영화세계』의 성격은 대중지에 가까웠다. 잡지의 발행주체 역시 "명실 공히 본방 유일의 영화 대중지를 지향하고"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영화 제작열기가 뜨거워지던 상황에서 58년 이후의 『영화세계』는 본격 평론지로서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이에 따라 지성계층의 독자를 흡수하려는 시도, 업계의 부패와 비위를 대담하고 엄중하게 비판하려는 태도가 반영된다. 이 전환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58년 5월호의 특집 좌담 「한심할지고! 영화집단」이다. 이 좌담에서는 당대 영화 저널리즘의 현황을 고찰하는 부분이 주목된다. 당시 발행되던 다섯 편의 영화 잡지 중 『연대영화』, 『영화세계』를 제외한 『국제영화』, 『스크린』, 『신영화』등은 정기적으로 발간되지 못했다. 좌담은 각각의 영화 잡지들을 논평하며 『영화세계』를 추어올리고 있지만, 50년대 영화 저널리즘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58년 9월호는 평론잡지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가 본격화 되었다.

 

이 동기와 의지는 그 규격변용보다 내용에 있어 좀 더 충실한 기사를 실어 필자진의 강화는 물론 발전해 나아가는 우리 영화계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고 싶은 것이 본지의 사명이며 또한 목표이기도 하다. 더욱이 정당한 비평을 가하여 자라가는 영화계의 스승지로 추앙받고 싶은 것이 본지의 유일한 소망일 것이다. (58년 9월호, 강인순, 「(사론) 혁신판을 내면서」)

 

또한 편집후기는 젊은 독자, 영화 학도들을 위한 잡지가 되겠다면서 잡지의 타깃 변화에 대해 설명한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오락지 대신 영화 학도들이 참고할 수 있는 전문지, 영화평론지도 거듭남으로써 당대의 영화잡지들과 차별화하겠다는 의도를 표명한 것이다.

별 다른 특색을 구축하지 못하고 영화소개와 가십으로 지면을 채우는 타 잡지들과 달리, 정확한 비평과 충실한 내용을 통해 국내 영화계를 선도하겠다는 계획은 다음호에도 이어진다. 10월호 편집후기에는 잡지의 쇄신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싣는데, "새로운 스타일로 구월호가 나가자 격려와 공격이 연달아 날라 왔다. 오식이 많고 편집이 딱딱하다는 공격과 갈망하던 영화평론지에 많은 기대를 갖는다"는 것이다.

본 잡지는 종국에 예술성도 있고 오락성도 있는 '종합잡지'로 평가받게 됐는데, 전문 평론지와 오락지 사이를 선회하던 『영화세계』의 궤적은 영화 저널리즘의 사명감과 생존전략을 모색한 흔적을 반영한다.

 

5. 1950년대 영화 저널리즘의 선두주자로서의 의의

현재 확인 가능한 마지막 호인 63년 8월호에는 개정된 영화법에 대한 영화인들의 반응을 실었다. 이듬해 『영화세계』는 법정 발행 실적으로 올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등록취소 처분을 받는다. 50년대에 영화 비평들은 선전이나 광고로 전락했고, 부흥기를 타고 발간된 잡지들은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보이며 특색을 잃어가기도 했다. 이 와중에 『영화세계』는 영화 저널리즘을 선도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지속적으로 필진을 교체하고 체제를 개편하는 등의 변화를 시도한다. 또한 저널리즘으로서 자성적 성찰도 병행하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영화세계』의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줄타기는, 영화 저널리즘으로서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 잡지의 정체성 모색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영화법은 1962년 1월 20일 제정 공포 되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자연 성장을 겪고 있던 영화계에 최초로 '영화 행정'이 시작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1970년대까지 총 4차의 개정이 있었으나 영화업 등록제, 수출입 추천제 등 초기의 틀은 유지되었다. (「최초의 영화법 개정과 기업화 정책」, KMDb)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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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쏙독_새